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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향녀와 호로자식 그리고 홍은동 유래

category 기타자료 2023. 4. 4. 23:02

환향녀와 호로자식 그리고 홍은동 유래

 
 병자호란 
임진왜란은 1592년 임진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의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을 말합니다. 정묘호란은 1627년 정묘년에 후금이 광해군의 폐위문제를 구실로 침락해, 협상으로 형제의 관계를 맺고 철군을 하게 됩니다 .
 
병자호란은 1637년 병자년 1월 3일 부터 1637년 2월 24일까지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을 말합니다.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변경하고, 조선과 형제국이 아닌 군신 관계로 바꾸자는 요구를 조선이 거절하자 침략한 것입니다. 
 
조선의 임금인 인조는 청군의 너무 빠른 진군으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항거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청의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9번씩이나 절을 함으로써 치욕스런 항복의 의식을 치르게 됩니다. 이것을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라고 합니다.
 
청 황제는 병자호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삼전도비(청황제공덕비)를 세우게 됩니다. 삼전도비는 조선말 청일전쟁후 땅속에 묻혔으나 1917년 조선총독부가 다시 세웠고, 1952년 문교부 주도로  다시 땅속에 묻었으나 홍수로 인해 다시 드러나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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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향녀
병자호란으로 인해 60만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 가게 되고, 그 중에서 여자만 50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환향녀(還鄕女)는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를 말합니다. 많은 수모를 받으면서 고생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반기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조선의 정서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했습니다.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의 기본적인 윤리를 숭상하며 정절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던 조선의 사회가, 오랑캐에개 정절을 빼앗기고 돌아온 여인들을 좋은 눈으로 볼 수 만은 없었습니다. 
 
정절을 잃었으면 남편과는 이미 인연이 끊어진 것으로 보는 퐁속하에서 양반가에서는 환향녀들애게 자결을 강요하거나 이혼을 요구하게 되는 사회문제가 생깁니다. 이혼이 법률적으로 금지된 사회라, 환향녀와 살지 못하겠다는 상소가 끝없이 올라오게 됩니다.  
 
조정에서는 공론을 거친 끝에 [포로로 끌려갔다고 모두 정절을 잃었다고 볼 수 없고,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을 감안하면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게 됩니다. 조정의 공식 입장은 이혼과 재혼 불허]로 결론을 내립니다.
 
 홍은동
사회적으로 환향녀에 대한 문제가 번지자 인조는 특단의 대책으로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모든 과거를 불문에 붙인다]는 어명을 내립니다. 홍제천은 회절강(回節江)으로 몸을 씻으면 절개가 돌아온다고 하여, 주변에 많은 환향녀들이 몰려 살기 시작했고, 임금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홍은동이 탄생하게 됩니다.
 
 호로자식
호로(胡奴)자식은 환향녀들이 낳은 오랑캐의 자식이라는 의미이지만, 최근에는 굥양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에 아첨하여 벼슬을 얻은 사람들을 비하하여 호로자식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